새 노트를 사 놓고 몇 달째 첫 장을 못 넘기는 사람이 있어요. 표지가 예쁠수록 더 그래요.
저는 글 쓸 때 비싼 연필을 꺼내서 기분 내는 걸 좋아해요. 연필이 좋다고 글이 잘 써지진 않아요. 그래도 그걸 쥐면 오늘 쓰는 글이 좀 대접받는 느낌이 들어요. 그 느낌 하나로 한 줄을 더 쓰기도 해요.
꼭 비싼 물건일 필요는 없어요. 평소보다 조금 아끼는 걸 꺼내면 돼요. 손에 쥐었을 때 무게가 맞는 펜, 종이에 닿는 소리가 좋은 연필. 연필 깎는 소리나 심 냄새까지 쓰는 일에 들어간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고, 샤프의 딸깍 소리가 더 좋은 사람도 있어요. 취향은 다 달라요.
노트도 마찬가지예요. 줄 노트는 글이 가지런해지고, 무지 노트는 낙서가 늘고, 방안 노트는 표와 그림이 많아져요. 같은 사람이어도 종이에 따라 쓰는 내용이 달라져요. 그래서 한 권으로 다 하려 하지 않고, 용도마다 한 권씩 두는 사람도 있어요.
펜 끝 굵기도 글의 분위기를 바꿔요. 가는 펜은 작고 조용한 글씨가 되고, 굵은 펜은 마음이 큰 글씨가 돼요. 같은 문장을 두 가지로 써 보면 읽는 속도까지 달라져요. 한번 해 보면 재미있어요.
지우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어요. 연필의 좋은 점은 틀려도 지울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우개 자국이 남은 종이를 보면, 한 번 고쳐 쓴 마음이 그대로 보여서 저는 그것도 글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새 지우개의 모서리를 처음 쓰는 순간도 은근히 기분이 좋아요.
필통을 열어 보는 것도 하나의 놀이예요. 오늘은 어떤 걸로 쓸까 하고 고르는 동안, 쓸 말이 조금씩 가까워지기도 해요.
가게에서 써 보기
살 때는 시필지가 있으면 거기에 이름과 아무 문장이나 써 봐요. 연필은 심이 얼마나 진한지, 볼펜과 만년필은 잉크가 번지는지 눈여겨보게 돼요. 노트는 종이가 얇은지 두꺼운지, 뒷장에 비치는지, 펼쳤을 때 잘 눌려 있는지가 은근히 중요해요.
남들이 좋다고 해도 내 손에 안 맞으면 서랍으로 들어가요. 내 손이 편한 쪽이 맞는 쪽이에요.
가격보다 쓰는 빈도로 고르면 편해요. 매일 쓸 거라면 조금 좋은 걸 사도 덜 아깝고, 가끔 쓸 거라면 무난한 쪽이 마음 편해요. 한 자루를 오래 쓰면 손때가 묻고, 어느새 정이 들어요.
예쁜 노트의 첫 장은 일부러 망쳐 두는 게 좋아요. 날짜를 적고, 낙서를 하고, 줄을 삐뚤게 그어요. 한 번 더럽혀진 종이 앞에서는 다음 장이 훨씬 쉬워요.
오늘 쓸 연필을 고르는 데 일 분을 쓰는 것도 작은 의식 같아서 좋아요. 글을 안 쓰는 날에도 책상 위에 올려 두면 괜히 마음이 놓여요.
기차 게임의 일기장과 편지지도 그런 마음으로 그렸어요. 종이 결, 갈색 선, 접히는 편지지. 화면 속이지만 필기구를 꺼낼 때의 기분이 조금은 났으면 해서요. 편지지는 여섯 종류예요. 마음에 드는 한 장을 골라 보세요.
이 게임에서는 연필을 쥐는 대신 일기장을 열어요. 그림일기라면 선을 그어 볼 수 있고, 글 일기라면 한 줄을 적을 수 있어요. 아직 쓸 말이 없으면 편지지만 골라 보고 닫아도 돼요. 종이를 고르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반쯤 나니까요.
쓰고 나서 연필을 제자리에 눕혀 두는 순간도 괜히 좋아요. 오늘 할 일이 끝났다는 표시 같아서요.
책상 위에 연필이 한 자루 놓여 있어요. 심은 방금 깎아 뾰족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