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는 사람이 없는 편지를 써 본 적 있나요?
없어도 한번 해 볼 만해요. 편지는 보내려고 쓰는 글이지만, 쓰는 동안 이미 할 일의 절반은 끝난 글이기도 해요.
손으로 쓰면 느려요. 키보드로 치면 금방인 문장도 한 글자씩 시간이 걸려요. 그 사이에 이 말을 정말 하고 싶은지, 어떤 순서로 말할지 한 번 더 고르게 돼요. 틀리면 줄을 긋고 다시 써요. 그 줄도 편지에 남아요. 삐뚤어진 글씨는 쓴 사람의 모양이라 나쁘지 않아요.
펜을 잡으면 글씨체도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보낼 편지는 또박또박, 나에게 쓰는 편지는 흘려서. 같은 사람 손인데 두 장을 나란히 놓으면 표정이 달라 보여요.
첫 문장이 안 나올 때는 두 가지 중에 골라요.
- 받는 사람 이름부터 적어요. 이름 아래에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다"만 써도 시작이 돼요.
- 날씨 이야기로 열어요. 아니면 "요즘 잘 못 잤다"처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돼요.
일단 시작하면 하고 싶은 말은 뒤에서 따라 나와요. 잘 쓰려는 마음은 책상 옆에 잠깐 내려놓아요. 마지막 줄에는 날짜를 적어 둬요. 나중에 꺼내 읽을 때 그날 공기까지 같이 떠오르거든요.
다 쓴 편지를 꼭 부쳐야 하는 건 아니에요. 접어서 서랍에 넣어 두어도 되고, 다음 날 다시 읽어 봐도 돼요. 머릿속에서 엉켜 있던 이야기가 종이 위에서는 한 줄씩 차례로 놓여요.
편지는 받는 사람을 떠올리며 쓰는 글이라, 일기와는 말투가 달라져요. "있잖아" 하고 말을 거는 자리가 생기거든요. 그래서 평소 혼자 하던 생각도 편지에서는 조금 더 부드럽게 나와요. 말하는 상대가 한 명 있으면 문장이 길어졌다가 짧아졌다가, 대화처럼 흘러요.
종이를 고르는 일도 쓰는 맛의 하나예요. 줄이 있는 종이는 줄을 따라 가지런히 가고, 빈 종이는 글이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요. 어느 쪽이 더 좋다는 건 없어요. 오늘은 어느 쪽 손이 끌리는지 보는 정도예요.
편지를 접는 순서도 은근히 눈에 들어와요. 반으로 접고, 한 번 더 접고, 모서리를 맞춰 눌러요. 그 짧은 시간 동안은 쓴 말을 다시 읽어 볼 틈이 생겨요. 봉투에 넣기 전에 한 번 소리 내어 읽어 보는 사람도 있어요.
이 게임에는 편지 쓰는 책상이 있어요. 편지지를 고르고, 접고, 봉인하는 과정을 일부러 넣었어요. 서두르는 글보다 천천히 쓰는 글이 어울리는 곳이었으면 해서요. 다 쓰면 이름 없이 우체통에 넣어요. 승무원이 받아 가고, 어떤 빈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남긴 봉투가 놓여 있어요. 연락처와 링크는 적을 수 없게 막아 두었어요.
받아 보는 쪽 이야기도 해 볼게요. 모르는 사람의 편지를 펼칠 때는 조금 조심스러워요. 읽다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읽기만 하고 덮어도 돼요. 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편지도 있다고 생각해요.
길게 쓸 자신이 없는 날에는 짧은 편지도 좋아요. 인사 한 줄에 오늘 본 것 한 줄이면 충분해요. 짧은 편지는 짧은 대로 받는 쪽이 한 번에 읽을 수 있어서 가벼워요.
쓰다가 막히면 창밖을 보다 와도 돼요. 다 못 쓰고 닫아도 돼요.
창밖으로 작은 역이 하나 지나가요. 편지지는 아직 반쯤 비어 있어요.